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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로 교통되는 전통과 현대, 그 허정의 절대 공간

△글=김상철(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가)

 

    동양회화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조형체계 중에는 비덕(比德)이라는 심미 원칙이 있다. 이는 자연물의 고유한 속성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덕성에 비유하여 그 사물을 창작의 소재로 삼아 그 연관 관계를 비유와 상징을 통해 표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덕의 상징적 기법은 일찍이 선진시대부터 널리 통용되었던 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군자나 세한삼우 같은 것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군자를 통해 표출되는 심미체험의 본질은 곧 작가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격조(德)를 자연물의 이미지로 풀어낸 것(比)이다. 다시 말하자면 심미주체의 주관적 관념인 도덕적 가치를 심미객체로서의 자연물에 투사하여 조형적 아름다움을 표출하는 것이다.

 

작가 김현경의 작업은 재료로서는 수묵과 소재로서는 대나무라는 두 요소에 의해 견인되고 있다. 소재와 표현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작가의 화면은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은 전통의 틀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자신이 속한 현대라는 시공을 반영하고자 함이 역력하다. 일단 작가가 취하고 있는 대나무는 분명 사군자에서 비롯된 상징성을 취하고 있음이 여실하다.

 

그러나 과연 작가가 지조와 절개, 그리고 올곧은 선비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사군자로서의 대나무를 여전히 취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새삼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사군자는 전적으로 유교적 덕목을 기본으로 하는 전통시대의 산물이다. 이에 반하여 작가의 작업은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다양한 사유를 대나무라는 형식을 통해 표출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신으로서의 대나무의 상징성과 연계된 것이겠지만, 적어도 유교적 덕목을 드러내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사실 대나무는 굳이 사군자로서의 덕목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가 대단히 흥미로운 조형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곧게 하늘을 향해 뻗은 수간의 형태도 그러하지만, 무리지어 도열한 대숲의 정경은 마치 강건한 병사들의 사열을 보는 듯하다. 솔숲에 부는 바람을 송도(松濤)라 표현하고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죽풍(竹風)이라 형용한다.

 

죽풍은 댓잎을 흔들어 사각거리는 청각적 청량감으로 전해진다. 작가의 대나무는 형상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이슬, 안개 등의 미세한 움직임의 포착과 표현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구체화하고 있다. 그것은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것을 청각적이고 감성적인 것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화면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 함이 보다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작가의 대나무는 지극히 정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엄정한 형태로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른 대나무의 군락들로 그러하지만 몇 가닥 잎사귀로 구성된 화면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마치 텅 빈 것과 같은 허정(虛靜)의 상태를 통해 현실적인 감각을 무력화 시킨다. 더욱이 수묵이라는 대단히 함축적이고 개괄적인 재료를 통해 표출되는 작가의 대나무들은 이미 객관의 조건에서 벗어나 사유와 사색의 단서로서 작용하고 있다. 화면은 극히 정적이지만 그 속에는 날카롭고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하다. 도열한 듯 한 대숲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구축된 공간에서 의미가 읽혀진다.

 

그것은 마치 현실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대숲을 지나 비로소 이르게 되는 피안(彼岸)의 통로처럼 청정하고 엄숙하다. 이는 작가의 내면을 통해 배태되고 숙성되어진 온갖 삶의 기억들이 시간이라는 가공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확보된 정화의 절대 공간인 셈이다. 작가의 대나무가 단순히 사군자의 연장으로 읽혀지지 않는 소이이다.

 

몇 개의 댓잎으로 구성된 단순명료한 화면은 작가가 대나무를 취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가냘픈 줄기에 의지해 허공을 가르고 있는 댓잎들은 마치 사색하는 현자의 모습처럼 엄정하다. 그것은 단지 생태적인 현상적 상태가 아니라 공간을 구획하고 가는 줄기에 매달린 무거운 잎의 대비를 통해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위태한 바람에 흔들리듯 미세한 흔들림을 통해 구현해 내는 것은 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운율과 리듬 같은 음악적 조화이다. 그것은 떨림을 통해 공간에 공명을 일궈내고, 그 공명을 다시 지극히 정적인 질서 속으로 수렴해 내는 것이다. 그것은 허정의 절대 정적이자 현실에서 벗어난 지극한 관념의 공간이다.

 

비록 수묵을 작업의 지지체로 삼고 있지만 작가의 수묵은 전통적인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필획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필묵의 심미를 대신하는 것은 조형적으로 가공된 면적인 표현이다. 작가는 일획, 혹은 일필의 호방함 대신 수묵을 중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독특한 심미적 특질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종이와 수묵이라는 특유의 물성을 축적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종의 관계의 축적이다. 스미고 번지며 이루어지는 수용성 안료 특유의 물성은 작위와 무작위가 교차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물성의 관계는 물론 시간이라는 개념 역시 수용해 내고 있다. 시간은 자연의 언어이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조형의지와 전통적인 수묵의 물성, 그리고 이를 통해 발현되는 우연의 효과를 화면 속에 조형의 요소들로 수렴해 냄으로써 특유의 구축적인 화면을 일궈낸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수묵에서 강조하는 교조적인 정신성의 강조에서 벗어나 물성 자체를 통해 수묵을 조형적으로 해석해 보고자 하는 경우라 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작가의 작업은 수묵과 사군자라는 전통적인 내용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의 주관적인 해석과 가공을 통해 기성의 경직된 독해에서 탈피한 독특한 화면을 연출해 내고 있다. 전통은 시대에 따라 변할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치를 호흡함으로써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전통에 바탕을 두되 현대라는 시공을 표출하고자 하는 작가의 기본적인 지향은 충분히 긍정될 수 있을 것이다.

 

비덕이 사군자의 기본적인 조형원리라 한다면, 그것은 사물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이물비덕(以物比德)과 자신을 통해서 사물을 해석하는 이아관물(以我觀物)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작가가 취하고 있는 입장은 상대적으로 이물비덕의 경향이 두드러진다. 만약 이아관물, 즉 자신의 주관적인 시각과 사유를 통해 사물을 재해석하여 의미를 표출해낼 수 있다면 작가는 어쩌면 전통과 현대라는 민감한 접점에서 자신의 분명한 위치를 확인하고 지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