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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을 이용한 비움(虛靜)의 세계

-김현경의 대나무 그림을 중심으로-

△오세권(미술평론가, 대진대학교 교수)

 

     수묵화는 한국화의 표현 가운데 중요한 표현으로 오랫동안 채색화와 양립해 왔다. 채색화가 화원 등의 전문가들에 의해 그려진 것에 비해 수묵화는 사대부 계층이 즐기고 발전시키면서 채색화와 수묵화라는 양립구조를 형성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수묵화는 한국화에 있어 중요한 표현 수단이 되었다. 특히 수묵 표현에 동양의 정신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신념과 논의들을 바탕으로 한국화의 표현은 수묵정신으로 무장해야 했으며 수묵화로 한국적인 정신을 담아내려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80년대 전반기에는 한국화 분야에서 수묵화의 흐름이 왕성하였다. 채색화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식되면서 일본화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피할 수 있었던 수묵화는 현대 한국화의 주류가 되었고 1980년대 들어서는 수묵화의 다양한 실험과 표현 방법들이 나타나면서 전성기를 누렸던 것이다.

 

근래 들어 수묵을 이용하는 표현이 많이 줄어들었다. 시대변화에 따라 한국화의 표현도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화 표현에 있어 수묵의 표현을 창작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들이 많다. 그 가운데 김현경도 수묵화를 한국화 표현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이다.

 

김현경의 작품세계는 대나무(竹)를 주제로 하면서 표현재료는 수묵을 이용하여 ‘비움(虛靜)’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비움’은 작품을 구상할 때 주변 생활과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주변의 일에서 벗어나 조용히 명상하며 마음을 비우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대나무의 여러 가지 형상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백 공간의 조화에서 나타나는 비움을 말한다. 즉 김현경은 창작에 있어 ‘명상을 통한 비움’ 과 ‘여백 공간을 이용한 비움’ 의 작품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나무를 통하여 자연의 생명성을 수묵으로 담아낸다. 대나무의 하나하나 개체적인 표현 보다는 쭉쭉 뻗어서 올라간 대나무 숲을 통하여 자연 생명성들의 강건함과 조화를 표현해 낸다. 이에 대하여 김현경은 “ ... 나는 자연을 화면에 담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제는 대나무 숲이다. 쭉쭉 뻗어 올라간 대나무 줄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눈은 하늘에 닿는다. 하늘과 대나무의 조화가 어울려 있다. 그리고 어느새 나 자신도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 가만이 눈을 감고 들어본다. 바람소리, 바람에 바스락 거리는 대나무의 잎 소리, 새소리,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소리들이 들린다. 한참 눈을 감고 있다 보면 나는 한 그루의 대나무가 되어 있다. 마음을 비우고(虛靜) 아무 생각 없이 자연에 몰입된 나는 정신을 놓고 나를 잃어버리곤 한다. ... 나는 대나무 숲의 이미지를 수묵으로 표현한다. 수묵의 오묘한 색채를 이용하여 대나무 숲 사이에 비추어 내리는 빛과 대나무 잎들이 사각대는 소리 그리고 바람에 춤추는 대나무들을 그려본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김현경은 대나무를 대자연의 이미지로 상징화하여 수묵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표현된 대나무들은 현장에서 눈을 감고 명상으로 체험된 형태와 바람의 소리가 조화된 자연의 이미지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현경이 제작한 작품의 화면을 보면 대나무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대나무의 형태가 뚜렷하지 않으면서 다소 추상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대개 대나무는 숲을 이루고 있다. 새로운 생명의 힘을 나타내며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거나 바람에 흔들리는 것으로 표현된 작품도 있다.

 

그리고 울창한 대나무의 숲에서 햇빛이 스며들어 오는 것 같은 빛의 흐름이 여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대숲 속에 안개 같은 느낌의 여백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며, 창 넘어 보이는 것 같은 대나무의 실루엣이 얼른거리기도 한다. 나아가 하나의 화면에 추상과 구체적인 형상이 동시에 있는 중층구조의 화면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검은 먹색의 화면에는 자연의 울림과 함께 호흡들이 내재되어 생명성을 나타내고 있다. 대나무가 수묵으로 표현되어 있어 수묵의 변화에 따른 여백과의 조화가 화면 전체 구성의 핵심이다.

 

한편 비움(虛靜)이라는 개념 자체는 당초 도가의 수양방법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었으며 최초의 예로는 『노자』 16장에서 나오는 “비움(虛)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靜)을 지키기를 독실하게 한다.” 이다. 『노자』의 ‘허정’ 상태는 만물이 생장하였다가 돌아가는 귀결점이다. 그것은 일체의 세속적 욕심과 지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고요히 세계를 관조하는 상태를 말하며 “작위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는(無爲而無不爲)” 상태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러한 ‘허정’의 상태를 유지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획득하고 도의 경계를 맛볼 수 있는 것으로 논의하였다. 그리고 『노자』에 이은 『장자』 에는 『노자』의 ‘허정’ 논의를 보다 발전시켜 심미적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이를 중국 고전 미학의 중요 범주의 하나로 확립시켰다.

 

김현경은 ‘허정’ 개념을 자신의 창작개념으로 끌어들려 재해석하였다. 창작을 위한 상상에 있어 주변적인 요소들을 잊고 고요하게 앉아서 명상한다. 그 명상 사이로 틈틈이 나타나는 아련한 이미지들을 작품으로 표현해 본다. 특히 오랫동안 작품의 주제로 표현해 왔던 대나무의 이미지들을 담백하게 수묵으로 표현해 본다. 나아가 대나무의 이미지들을 역으로 지워가면서 ‘비움’으로 대나무를 표현해 본다. 화면에 수묵과 여백의 조화를 적절하게 나타냄으로서 ‘비움’으로 표현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여백조차도 의도적인 것보다 자연스럽게 ‘비움’을 표현해 본다.

 

이상과 같이 김현경의 작품세계는 대나무를 주제로 하면서 수묵을 통한 비움(虛靜)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감정을 절제하고 주변의 것을 버려가는 비움과 표현의 여백을 작품 속에 어떻게 융합시켜 조화롭게 표현하느냐 하는 허정의 창작방법은 그의 수묵 표현을 더욱 심화시키고 표현의 확장을 가져올 것으로 생각된다.